값싼 정의와 마주친 세계 - 삼성바이오 사건 이후 market

현대 테러리즘에 대해 쓴 기사에서, 테러리즘을 "값싼 전쟁"으로 표현한 기사가 있었다. 수백만 달러의 미사일, 엄청난 유지비의 군대 시스템으로 전쟁을 마주하는 선진국들을 상대로 세뇌된 전사에게 AK47 하나를 들려주는 것만으로(심지어는 그냥 훔친 트럭만으로) 인명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정의감을 발현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없는 인터넷 시대에 "값싼 정의"의 실현은 그냥 전사만으로도 충분하다.

원래 사람들은 지배계급간의 투쟁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순전히 추측이지만 조선시대 유생 아닌 농민들이 훈구네 사림이네 하고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로 오면서 지배계급은 승리를 위해서는 자기들이 싸우는 사안과 전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포섭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예전에는 고무신 나눠주면서 부정선거를 했다면 이제는 언론을 이용한 정의감 주입으로 세련되게 변화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원래대로라면 먼저 뭐가 옳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절대악(예를 들면 식민정부나 독재자)이 있던 시기라면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비록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나치를 끌어들인 것과 같은 케이스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건 실천방법의 문제이지 애초에 정의감의 발현, 문제제기 과정이 잘못된 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느정도 사회가 성숙하고 또 복잡해지면 그때부터 상대를 유치하게 절대악으로 정의내리고 바로 정의구현에 나서는 짓은 하면 안 된다. 특히 "값싼 정의"의 주 공격대상인 "내가 한번 보니까 이건 아닌 것 같은 것들"은 사실 그 판의 이해관계가 얽힌 플레이어들, 혹은 전문가들이 수십년 전에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고민해 온 최선의 결과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창 유행했던 어떤 판결이 잘못됐네 하는(판결문은 읽지 않음) 분노와 청원이 딱 이 케이스에 맞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연결/관계기업 회계처리에 대해서 애초에 IFRS가 뭔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것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정의를 외치고,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기업회계에 대한 철학을 읊어대는 사태가 벌어졌다(당연히 삼성 편인 쪽도 대다수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본인 딴에는 엄청나게 몰입해서 "정의"를 외치지만, 그 정의의 기준은 사실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이랑은 별로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어느 쪽이 정의의 편인지 판단을 내리는 쪽을 이제 그냥 언론이나 인터넷 글에 위임해 버리고, 분노 발산과 자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회계사여서 쉽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연결회계와 관련해서는 회계를 모르는 사람이어도 몇 시간 공부해서 파악할 수 있고, 그러고 나서 어느 쪽이 정의인지 판단해도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은 깔끔하게 그 판단을 남에게 위임하는 쪽을 선택하더라.

점점 더 양극화되는 정치 성향을 보면(https://blog.naver.com/santa_croce/221112506782) 판단 아웃소싱 비즈니스가 성황을 이룬다는 느낌이 단지 느낌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얼마나 큰 문제냐면, 인류가 어떻게 과학 발전을 이룩했는지 생각해 보자. 미신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이성으로 넘어오는 과정의 핵심은 

1) 잘 모르겠으면 판단을 유보하고 
2) 기존의 권위나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주지하며
3) 공부/연구는 자신이 동조하는 사람들의 글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반증이 없는지, 자신의 논리에 허점이 없는지 찾는 과정이다

인데 최소한 정치/언론 쪽은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 나름 전문가로서 삼성바이오 사건을 지켜본 계기를 통해, 내가 함부로 뭣도 모르면서 어디서 열을 내지 않았나 자중해 본다. 인터넷에서 금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한은총재는 한심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미친놈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도 어디서 그딴 소리를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내가 옳다고 믿고 싶고, 논쟁에서 이기고 싶고, 설명하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이지만 참아만 내면 내 밑천을 안 드러내도 되니까 이쪽이 훨씬 성숙한 태도일 것 같다.

인센티브 - 지각이 늘어난 어린이집 이야기

이런 실험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데리러 오는 데 지각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각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매기기로 하자 오히려 지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더 늦게 왔다. 이후에 벌금을 없앴지만 지각하는 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미안함이 돈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이 케이스를 가지고 "그러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함부로 치환하면 안 돼"라고 간단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저 벌금이 정말 징벌적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지각하는 부모들은 사라지고(그리고 아이 픽업을 제시간에 대신 해주는 일자리가 생기고) 논문을 심사하는 사람은 왜 사람이 밥을 먹으면 똥을 싼다는 걸 논문으로 내나요?라고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실험 설계자들은 아주 절묘하게, 진짜 어린이집 원장이라면 매기지 않았을 저렴한 벌금을 매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좀더 현실적인 어린이집 원장이었다면 징벌적인 벌금을 매겼던가, 초과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벌금을 매기고, 결과적으로는 지각이 줄거나 직원에게 보상을 주던가 하는 방식으로 원래의 지각 문제가 완화되었을 것이다.

저 실험 케이스를 통해서 "인센티브/벌금 구조를 제대로 설계하는 건 진짜 진짜 어려운 일이고", "서비스가 한번 금전으로 치환되면 다시 되돌리기란 정말 정말 어렵다" 라는 교훈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비시장 규범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시장으로 돌리지 말자로 가자는 건 너무 과대 해석이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1) 저자가 위 어린이집 이야기처럼 '인센티브가 잘못 설계된 사례'와 '정말로 인센티브 도입이 적합하지 않은 사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2) 공동체, 시민규범을 너무나 쉽게 우월한 기준으로(아무런 결과에 대한 비교연구 없이) 함부로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기존의 규범이 구성원들의 권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때 인센티브는 매우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케이스 중 하나로 핵폐기장 유치가 있었다. 시민들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 사는 지역에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냐고 묻자 찬성이 더 많았으나, 보상을 준다고 하니까 찬성하는 비율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의 시민의식은 분명 거래비용을 엄청나게 떨어뜨려 줬지만, 구성원들의 자부심이 과연 1년 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주민들의 근시안, 심하게 말하면 정신승리를 이용한 국가권력의 넛지 사례에 오히려 가깝지 않을까? 징병제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공동체의식의 한 케이스로 나왔는데, 다른나라 사람들은 크 징병제 공동체의식 간지-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인지, '돈주고 살 필요 없는 것'이었는지 체험해 봤으니 마이클 샌델과는 다르게 생각할 것 같다.

레스토랑 노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노쇼가 얼마나 미안하고 민폐인 짓인지 열심히 홍보하는 건 분명 효과가 있다. 서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레스토랑 예약 앱들이 나오고, 더 쉬운 결제를 제공하려고 하고, 예약금을 걸거나 선결제한 손님에게 혜택을 준다. 아직은 인센티브 구조를 adjust하는 단계로 보이지만 노쇼 문제는 과거에 비해서 나아졌을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모든 것에 인센티브를 걸고 시장논리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규범에서 문제들이 생겼을 때, 잘 설계된 인센티브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도구라는 것이다.

분할된 회사의 재무제표 보는법 - 세아제강 미분류

세아제강은 올해 세아제강지주-세아제강으로 분할을 실시했습니다. 최근 지배구조 이슈 때문인지 이런 지주회사-사업회사 분할 사례가 업청나게 많았습니다. BGF-BGF리테일, 예스코홀딩스-예스코, 현대중공업, 효성 등등등등 헤쳐모여를 하도 많이 하면서 재무제표 분석은 엄청나게 복잡해졌고 투자하는 입장에서는 전기 또는 다른 회사와 비교하기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그나마 세아제강은 덜 복잡하고 분기보고서 주석에 비교하기 쉽게 써 놓은 것 같아서 세아제강을 가지고 분할된 회사의 재무제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세아제강 분기보고서를 볼까요,

포괄손익계산서

제 1 기 3분기 2018.09.01 부터 2018.09.30 까지

(단위 : 원)

 

제 1 기 3분기

3개월

누적

매출액

81,267,832,146

81,267,832,146

매출원가

78,585,818,246

78,585,818,246

매출총이익

2,682,013,900

2,682,013,900

판매비와관리비

4,257,834,878

4,257,834,878

영업이익(손실)

(1,575,820,978)

(1,575,820,978)

기타영업외수익

194,723,848

194,723,848

기타영업외비용

32,575

32,575

금융수익

652,535,127

652,535,127

금융비용

999,149,215

999,149,215

법인세비용차감전순이익(손실)

(1,727,743,793)

(1,727,743,793)

법인세비용(수익)

(419,255,645)

419,255,645

당기순이익(손실)

(1,308,488,148)

(1,308,488,148)

기타포괄손익

  

당기총포괄이익

(1,308,488,148)

(1,308,488,148)

주당이익

  

 기본 및 희석주당순이익 (단위 : 원)

(461)

(461)


미국 통상압박의 영향이었는지 3분기에는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가 아니라, 시험볼때도 실수를 안 하려면 제목을 잘 읽어야 합니다. 2018.09.01부터 2018.09.30까지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손익계산서는 2018년 9월초 분할이후 한달만의 손익계산서인 겁니다. 친절하게 3개월 말고 1개월이라고 적어줬으면 좋았을텐데요.

이제 세아제강지주의 분기보고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포괄손익계산서

제 60 기 3분기 2018.01.01 부터 2018.09.30 까지

제 59 기 3분기 2017.01.01 부터 2017.09.30 까지

(단위 : 원)

 

제 60 기 3분기

제 59 기 3분기

3개월

누적

3개월

누적

영업수익

2,202,621,356

8,647,085,971

1,702,808,239

187,171,803,760

영업비용

2,839,517,563

4,376,732,960

558,420,759

176,688,600,909

영업이익

(636,896,207)

4,270,353,011

1,144,387,480

10,483,202,851

기타수익

672,682,947

869,858,728

 

22,958,629

기타비용

12,000,007

32,000,007

 

2,374,156,060

금융수익

1,508,021,961

4,394,712,654

1,697,772,125

6,057,881,100

금융비용

82,908,672

875,961,169

(39,520,936)

5,115,782,652

법인세비용차감전순이익

1,448,900,022

8,626,963,217

2,881,680,541

9,074,103,868

법인세비용

4,736,134,459

6,854,999,648

(4,856,011,826)

(3,243,739,743)

계속영업이익(손실)

(3,287,234,437)

1,771,963,569

7,737,692,367

12,317,843,611

중단영업이익(손실)

107,468,679,166

134,135,474,224

30,636,360,998

58,609,413,205

당기순이익(손실)

104,181,444,729

135,907,437,793

38,374,053,365

70,927,256,816

기타포괄손익

(1,445,993,668)

(13,999,791,518)

1,755,212,116

11,339,449,738

 후속적으로 당기손익으로 재분류될 수 있는 항목

  

1,755,212,116

11,360,527,092

  매도가능금융자산평가손익

  

2,315,583,267

14,987,502,760

  당기손익으로 재분류될 수 있는 항목의 법인세

  

(560,371,151)

(3,626,975,668)

 후속적으로 당기손익으로 재분류될 수 없는 항목

(1,445,993,668)

(13,999,791,518)

 

(21,077,354)

  기타포괄손익-공정가치 측정 금융자산 평가손익

(2,743,186,416)

(19,304,925,006)

  

  순확정급여부채의 재측정요소

835,543,054

835,543,054

 

(27,806,538)

  당기손익으로 재분류될 수 없는 항목의 법인세

461,649,694

4,469,590,434

 

6,729,184

총포괄손익

102,735,451,061

121,907,646,275

40,129,265,481

82,266,706,554

주당이익

    

 기본 및 희석주당순이익 (단위 : 원)

21,185

24,656

6,600

12,200

  계속영업기본및희석주당이익(손실) (단위 : 원)

(668)

321

1,331

2,119

  중단영업기본및희석주당이익(손실) (단위 : 원)

21,853

24,335

5,269

10,081


아래에 중단영업주당이익이라는 셀이 따로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지주회사가 더이상 하지 않는 사업을 중단영업으로 분류했고, 저 부분이 분리된 세아제강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석에 있을 거니까, 보고서 주석 34.인적분할 (2)를 봅시다.

(2) 당분기와 전분기의 포괄손익계산서에 포함된 중단영업손익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위: 백만원)
구    분당분기전분기
3개월누적3개월누적
매출액156,526576,338199,355584,067
매출원가124,731456,255142,890453,253
매출총이익31,795120,08356,466130,814
판매비와관리비9,95145,03930,96684,355
영업이익21,84475,04525,49946,459
기타수익1,7843,0895111,428
기타비용2820812129
금융수익92914,4676,16617,058
금융비용2,21615,1075,93817,688
법인세비용차감전순이익22,31277,28626,22747,128
법인세비용6,31718,8493,6795,639
중단영업순이익15,99558,43622,54841,488
중단영업처분이익108,363108,363--
중단영업이익124,358166,80022,54841,488

이 표에서 당분기 3개월 중단영업순이익 15,995백만원이 세아제강의 7,8월 손익이었던 것입니다. 9월과 합산하면 세아제강의 손익은 +14,420백만원이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완전히 뜻밖의 선방한 실적이 되네요.

그 아래의 중단영업처분이익은 분할되어 나간 회사의 공정가치-장부금액차이만큼이 계상됩니다. 가상의 금액인 만큼 일회성 손익이 발생했다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큰 금액이 떠 있어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세아제강지주와 세아제강 각각 회사에서 발생한 당기순이익을 제대로 발라내는 거니깐요.



자사고 폐지에 반대한다: 우리나라 교육에 전체주의는 이미 너무 많다

나는 운이 좋았다. 다른 많은 친구들이 단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토플 시험을 준비하던(나는 그런 시험이 있는지도 몰랐고, 영어학원에서 보라고 한 토익 시험에서 600점도 넘지 못해 선생님이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에 영문도 모르고 합격했다. 물론 다른 어느 고등학생들이 그랬을 것처럼 학교는 짜증나는 곳이었다, 두발 단속하고, 벌점이 쌓여서 징계도 받고, 성적은 계속 꼴찌를 했으니 큰 사고만 안 쳤지 문제학생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장점들도 있었는데, 기숙학교여서 더 친구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큰 도서관에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었으며 철학을 갖고 가르치는 몇몇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단지 그 정도라면, 그때는 내는 돈에 비해서는 마진이 안 남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돌이켜 보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이상의 경험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더 많은 다양성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학교 다녀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학입시만을 위한 사관학교'라는 식으로 아는 척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 고등학교는 대학입시는 자기 능력의 일부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친구들이 있었어서 입시공부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화학,생물,정보 각종 올림피아드 대회, NGO활동도 하고, 정규 비교과 활동시간도 있었다. 이것도 다 입시준비라고 하면, 대신 그 친구들이 어떤 걸 좋아했고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룸메이트 중 하나는 neurorobotics를 하고 싶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우리가 기괴한 취미활동이라고 생각했던 컴퓨터 덕후들은 지금 구글, 페이스북에 가 있다. 학교 다닐 때는 망신스러운 음악을 했지만 지금은 꽤나 잘 나가는 가수도 두 명 있다. 문학은 빛을 발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한 곳이기에 아직 작가 데뷔 소식은 못 들었지만, 문학과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들 중 누군가가 곧 명작을 내 줄 것이다. 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온갖 스타트업 창업 소개/구인글이 넘쳐난다. 아직 졸업생이 2000명도 안 되고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치면 천 명 수준밖에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어느 집단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또 성과를 내고 있을까?


오늘날 교육에서 다양성은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다양성을 가장 잘 제공하는 고등학교는 내가 다녔던 자사고임이 분명하다. 전체주의자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공공성, 평등성'이 '사이비 자율성, 사이비 다양성'보다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물들지 않기 위한 좋은 책들에 익숙해 질 수 있었던 게 내 고등학교 시절의 최대 수확이었을 것이다. <1984>,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같은 책들 말이다.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의 꿈이 돈 많이 벌어서 우리가 다녔던 학교 같은 곳을 만드는 것이다. 졸업생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학교는 흔치 않을 것이고, 다른 학교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여기에 공감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를 없앨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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